윤석양 '청년에게만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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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양을 알고 계신가요~? 스물넷 청년 윤석양은 자신이 했던 양심선언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일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선 청년이 살기 위해 한 선택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윤석양은 1990년 5월 입대해 강원도 철원에 자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한 날은 지프차 한 대가 들어와 타라고 해서 윤석양은 얼떨결에 차에 탔다고 합니다. 도착한 곳은 대공상담소, 간첩 관련 일을 처리하는 보안부대였다고 합니다.
갑자기 윤석양에게 "어서 와라 최종규"라고 말합니다. 최종규는 가명이었고,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들을 숨겼다고 하죠. 그 당시 1987년은 민주화 열기가 절정이었고, 그만큼 단속도 심했다고 하죠.
학교 앞 복사집에는 위장 취업한 경찰이 수두룩 했고, 특히 서울대 앞에 있던 '모비딕'이란 주점은 주인과 직원들 전체가 군인이었다고 하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윤석양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윤석양에 대하여 잠깐 알아보고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윤석양.
윤석양은 1966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이사와 고려고등학교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노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1년간 학생 기자로 활동했고, 신문 기자를 꿈꿨다고 합니다. 하지만 뜻이 맞지 않아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88년 CA 그룹 학생회장 후보 선거운동본부 조직국장, 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혁노맹)의 전신인 "혁명의 불꽃" 그룹 선동 국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 5월 1일 대한민국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하게 됩니다.
서빙고 분실.
윤석양을 협박한 그들은 국군 보안 사령부의 수사관들이었어요.
수사관들은 입대 전, 조사하겠다며 같이 학생 운동했던 동료들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윤석양이 모른다고 하자 다시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고 하죠. 도착한 곳은 용산 서빙고동에 있는 서빙고 분실.
서빙고 분실은 김재규가 방첩활동을 위해 비밀리에 만들어진 취조실입니다. 간첩, 반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국가 체제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수사하는 것이 본 기능이었죠.
그러나 각종 공작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소로 변질되어 버렸죠.
그곳에서 윤석양 이병은 협박을 당했고, 같이 운동하던 박철민 선배가 어딨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계속 모른다고 하자 수사관들은 홍대 앞 커피숍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홍대 정문을 바라보다가 박철민이 보이면 가리키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박철민이 나타났습니다. 윤석양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고 하죠.
수사관들이 똑바로 말하라고 했고, 윤석양은 박철민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다음날 수사관들은 윤석양 이병을 불러, 학적부를 펼쳐 "여기서 네가 아는 얼굴 하나씩 짚어봐"라고 했습니다. 스물다섯의 청년에게는 정말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누가 상상을 하겠나요?
결국, 윤석양은 다 불었습니다.
그리고, 윤석양과 함께 학생 운동했던 친구들과 선배들이 잇따라 잡혀왔다고 합니다. 며칠 후, 보안사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불순한 대학조직, 일망타진'이란 보도를 합니다. 당시 총 48명이 검거됐다고 하죠.
이일로 수사관들은 다 승진을 했다고 합니다.
그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윤석양의 수기를 보면 '이날을 기록하려니 손이 떨린다. 지우려 애써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지워질 수도 없고 지워져서도 안 되는 사실을 지우려 하니까 말이다. 지우는 것이 고통이었으며 지워지지 않는 것이 괴로웠다. 증인이 없으니 보안사가 매도한 거라고 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그러나 증인은 있었다. 나였다. 양심의 소리는 아주 작고 고요하지만,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듣기조차 거북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민간인 사찰.
수사관들은 윤석양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술도 사주고, 심지어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소도 하고, 수사관들의 바둑 친구도 해주며 지냈다고 합니다.
한날은 윤석양 이병에게 보안사가 검거한 운동조직에 대해 보고서를 써보라고 했습니다. 보고서를 작성하던 중, 자료가 더 필요하다고 했는데, 2층 분석반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2층 분석반은 보안사의 기밀문서를 관리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캐비닛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며칠 후, 분석반 직원이 캐비닛 자료 정리를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자료를 정리하던 중,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란 자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 옆에는 번호도 있었는데, 김영삼 221번, 김대중 283번, 노무현 295번..
그 순간 직원이 자료를 빼앗아 캐비닛에 넣어 잠갔다고 합니다.
그날 밤, 윤석양은 몰래 분석반에 들어가 캐비닛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무려 1303명의 신상기록 카드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치인, 변호사, 종교인, 학생들까지... 뿐만 아니라, 플로피 디스크도 있었다고 하죠.
윤석양 이병은 이 모든 자료들을 들고, 탈영을 합니다.
보안사는 난리가 났죠. 윤석양을 찾기 위해 가족들은 물론 지인까지 압박했습니다.
윤석양은 위장을 위해 파마를 했다고 합니다.
청명계획.
탈영을 한 지 4일이 지나고, 윤석양은 지인을 통해 한겨레 신문사의 김종구 기자를 만납니다. 자료들을 보고, 김종구 기자는 윤석양 이병의 기자회견을 준비합니다.
당시 지명수배 중인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안사의 감시는 생각보다 넓고 깊었죠. 미행과 도청은 기본이었고, 사무실 맞은편 건물에 방을 잡고 지켜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기습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습니다.
추석 연휴로 KNCC 사무실이 텅 비자, 보안사는 안심하고 빈틈을 보였습니다.
극소수의 인원을 움직여 윤석양 이병의 기습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보안사가 했던 활동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대상자에게는 등급이 주어졌고, 그 등급에 따라 분류가 되었다고 합니다. 동향 파악 대상자를 분류해 요원을 붙여 주요 활동을 감시했고, 매달 동향 관찰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죠.
보고서는 엄청 세밀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랑 밥을 먹었는지.. 심지어 자택의 도면까지 그려져 있었다고 하죠.
보안사가 사찰한 것은 '청명계획'의 일환이었다고 하죠.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유사시 정부에 반하는 인물을 즉각 검거하기 위함이었던 것...
기자회견 다음날,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회적으로 비판이 쇄도했고, 여당과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3당 합당으로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했는데도 사찰 대상에 올랐던 김영삼도 불만이었죠.
당시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 최고위원은 "명색이 집권당 대표인 나마저도 보안사의 사찰 대상이라는 건 문제가 있다"라며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했죠.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0월 8일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을 전격 경질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분노는 줄어들지 않았죠. 이를 무마하기 위해 10월 13일 뜬금없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죠. 또한 서빙고 대공분실도 즉시 폐쇄하고, 보안사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꿉니다.
참.. 짜증 나게도 조폭 검거 소식이 쏟아지며, 많은 사람들은 옹호했고..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은 잊혔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 살았던 어른들은 범죄가 싹 사라졌다며 잘했다며, 사찰 사건은 입밖에도 안 꺼내죠.
청년에게만 있는 것
윤석양 이병은 도피 생활이 시작되었고, KNCC 목사님들이 발 벗고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거절하고, 시골에 내려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2년이 흘러, 지인의 연락을 받고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안사 수사관이 다가왔다고 하죠.
특수 근무 이탈죄로 2년 형을 선고, 육군교도소에 수감.
윤석양이 보안사 일을 시작했던 이유는.. 보안사에서 일을 하며 비밀을 알아내 세상에 알려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에 대한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험이겠죠...
그렇게 그는 목숨을 걸고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때문에 대한민국이 미약하지만 조금이나마 바뀌었죠.
반면 수사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약한 청년을 이용해 진급을 했죠.
나라를 바꿔보겠다는 청년의 동심을 짓 밝고, 타락시켜 결국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려고 했죠. 하지만 윤석양은 어른들이 미리 지정한 사회적 구조에 동화되지 않으려 이 악물고 버텼습니다.
그들은 왜 동심을 파괴하려 할까요?
동심은 아주 무서운 힘입니다. 동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키세요. 그들은 동심을 짓 밝으며 자기 자신의 입맛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청년이 생각하는 공정과 상식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동심을 지켜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누가 뭐래도 잘못된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지입 x니다. 그렇게 따지면 잘못한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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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양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모두 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정보도 궁금하시다면 상단의 글들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게시글이 유용했다면 하트(공감), 댓글, 구독을 해주시면 블로그 운영에 원천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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